“나는 네가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해.” 한때 나에게 만화 수업을 했던 누군가 말했다. 대중적이지 않은 나의 이야기와 그림을 보고 했던 말이었다. 만화는 대중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문화이자 예술이다. 대중과 독자들에게 외면 받지 않고 사랑받는 만화를 그리길 바란다는 그의 우려 섞인 조언이 나에게는 퍽 따듯하게 여겨졌고, 그의 방침에 따라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만화들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독자들의 호감을 사는 멋지고 예쁜 캐릭터와 정교하게 그려진 배경을 기준 삼아 ‘잘 그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완벽한 그림을 위해 노력했다. 몇 년 후 일정 수준의 실력이 달성 되자, 그의 바람대로 나는 많은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포털의 웹툰 작가가 되었다.
잘 그린 ‘완벽한’ 그림의 지표에 맞춰 나의 능력을 증명해내면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반년 정도 연재를 거듭해갈수록 마감에 쫓겨 그려낸 내 그림은 그러한 완벽이라는 기준에 성이 차지 않고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미려한 그림체와 휘황찬란한 이펙트를 필두로 하여 인기를 치고 올라오는 다른 신작들에 비해 나의 그림은 초라해보였다. 대중과 시장의 수요에 맞춘 나의 작화는 언제든 다른 누군가의 대체품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불안감에 잔뜩 긴장해있던 나를 위안해 준 것은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그래픽노블과 독립출판 만화들 이었다.
남자와 여자,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까지의 사랑을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 다룬 <아스테리오스 폴립>, 흑백의 거친 필력을 사용해 현대 사회의 가족의 단절과 고독에 대해 담담하게 보여주는 <에식스 카운티>, 텔레파시가 통용되는 사회에도 여전히 불안정한 인간의 관계를 담아낸 <대면>, 은유적인 이야기를 이미지와 결합하여 미학적으로 탐구한 <조형의 과정>과 같이 시장과 자본에 순응하지 않은 작품들은 그 결실로서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아카데믹한 틀을 벗어나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그림들은 작가가 보는 세상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 같았다. 허상의 세계를 ’완벽히‘ 구현해낸 것이 아닌, 불완전한 현실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를 다채로운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만화를 대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작가적 신념이 나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나는 ‘잘 그린 그림’보다 이야기와 주제를 담기에 적합하게 조형적으로 잘 다듬어진 ‘좋은 그림’에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장식적으로 세공되고 가득차고 그림들의 나열 대신, 독자들이 자신을 대입해보고 머무를 수 있는 여백을 가진 느린 호흡의 만화들이 내가 앞으로 가고 싶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의 완벽이라는 기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기준과 점수 속에서 우리는 줄 세워진다. 기대치에 다다르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에 자책하고, 자신보다 못한 주변 이들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하며, 자신보다 잘난 이에게 시기질투를 느낀다. 이 문제들은 그 완벽의 기준과 가치가 타인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줄지 눈치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는 대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이해하고, 장점과 매력을 더 끌어내어 자신이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하는 선두주자가 될 것이다. 세상의 기대와 잣대에서 벗어나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만드는 용기가 많아졌으면, 그런 용기를 담은 작품들을 많이 응원해주는 풍토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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