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 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그대여, 우리들 둔자(鈍者)는 길을 가면서도 길을 묻는 게 아닌가. 길에만 길 아닌 게 있는 법, 길에만 길 밖의 길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단지 무엇을 소유하려 어딘가로 떠난다. 그동안 그대는 무엇 위해 살고 또 무엇 위해 살지 않았는지. 저 길가에 피어난 풀들에게 물어도, 그대여 풀은 무엇을 위해 살지 않고 다만 자기 삶을 사랑하며 자기 생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여, 그대도 다만 삶의 자유를 위해 살아라. 그대가 그리는 머리 위 구름만큼의 무게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기도하라. 언제나 그 길 위에서 그대와 내가 삶을 사랑하고 자유에 지쳐 쓰러질 때, 길옆의 풀잎들이 나와 그대의 시린 발목을 덮어 주리니. 가을은 우리 어깨에 길 하나씩 올려놓고 슬며시 사라져간다. 그대와 내가 사랑할 길, 나와 그대가 끝까지 함께 지고 갈 그 길 하나.
밤새워 하늘에 별을 기르며 창문 곁에 서있던 갈참나무들 이 아침 우리 앞에 물이 든 잎을 날리며 비로소 가을 산으로 제 길 찾아 떠난다. 그대여 길은 길에서 놓여날 때 비로소 길로 채워지는 법, 작은 길조차 길 안에서 벗어날 때 새 길로 트이는 법이다. 가득 찼던 들녘이 스스로를 비워내 그 안에 길 하나 품듯이, 그대와 나 서로를 비워야 품을 수 있으리니. 이 가을 길 위에서의 생각 하나, 그대와 내가 비로소 서로의 길 안으로 열며 깊이 다가서는 이 길 하나. 김완하(시인·한남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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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작권자ⓒ대전일보사]http://m.daejonilbo.com/mnews.asp?pk_no=97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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