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겨울나무처럼
겨우살이 준비를 다 마쳤다. 마지막 추수로 처마 밑에 쌓아두었던 콩을 털고, 온돌방을 데울 참나무 장작도 넉넉하게 쪼개놓았다. 이런 내 한가로워진 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서울에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돌림병 때문에 갇혀 있던 답답함을 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친구들을 데리고 내가 사는 강원 원주 투어에 나섰다.
우리는 먼저 박경리 작가의 창작혼이 서린 박경리문학공원으로 향했다. 문학공원에선 단풍은 다 떨어졌으나 늦가을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토지>에 나오는 지명인 홍이동산으로 명명된 작은 언덕에는 우람한 소나무들이 푸름을 뽐내고 있었고, 모과나무·단풍나무·마로니에·라일락 등의 활엽수들 밑에는 낙엽이 뒹굴고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맛보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작가가 살아계실 때 머물던 창작실 앞 박경리 작가의 동상 옆에 모여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었다. 그러고 난 후 저마다 사색에 잠겨 공원 뜰을 거닐었다. 나 역시 나뭇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마로니에를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 너도 봄부터 여름까지 광합성을 하며 몸을 불리느라 바쁘고 힘들게 보냈겠지. 이제 찬 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칠 추운 겨울에 네가 할 일은 오직 잠, 잠, 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겨울나기를 하는 건 한해를 열심히 산 네가 누릴 아름다운 권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농을 건넨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 시상(詩想)이라도 떠오르셨나?”
“허허, 이 마로니에가 유익한 말씀을 건네시는군. 올 한해 힘들게 보냈으니, 자기처럼 이제는 좀 쉬라는 거야. 그렇잖은가. 나무들은 겨울엔 온전히 안식에 들잖아.”
내가 하는 말을 듣고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친구는 그저 벙긋 웃을 뿐이었다. 박경리문학공원을 나와 원주의 명소 몇곳을 더 둘러본 뒤 나는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나무가 내게 들려준 말처럼 어떻게 겨울을 잘 쉬며 지낼까 생각해봤다. 우리가 쉼을 누리는 것도 평소 잘 훈련돼야 한다. 끝없는 속도전 속에 살아온 이들은 시간이 여유롭게 주어져도 쉬지 못하고 괜히 자기를 들들 볶지 않던가. 은퇴한 후 한가롭게 여생을 누리겠다며 귀촌한 이웃들을 보아도 그렇더라.
문득 나는 얼마 전 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가 생각났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도시 문명을 떠나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2년 동안 은둔자로 사는 실험을 했다. 어느 날 그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녘까지 가문비나무와 호두나무 사이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새들의 노랫소리와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자 그는 노트를 펼쳐 이런 일기를 남긴다.
“아침인가 했는데 보라, 벌써 저녁이 되었네. 기록해둘 만한 거라곤 하나도 한 게 없네.”
우리는 어떤가. 뭔가 기록해둘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기록할 만한 게 없는 이런 무위의 시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로는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럴 때면 나는 밤중에 옥수수가 자라듯 쑥쑥 성장했다.”
고진하 (시인·잡초연구가)
(출처 농민신문 & 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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