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 경청(傾聽)
스마트폰 하나면 못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은행 업무부터 배달 주문에 이르기까지 스마트폰에 설치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직접 어디론가 가서 누군가를 대면(對面)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작은 스마트폰의 액정 위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상대에게 말을 걸 필요도 없다. 말을 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소통은 쌍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발화에서 ‘나’는 있지만 ‘너’는 없다. 그렇게 점점 우리의 삶에서 타자(他者)라는 존재가 배제되어 간다.
타자는 ‘나’를 규정해주는 존재이다.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나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타자는 나와 다른 낯선 존재이지만 ‘내’가 있기 위해서 반드시 요청되는 대상이다. 그런 타자의 존재가 점점 지워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도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비대면 환경이 점점 늘어나면서 타자가 사라지는 속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나’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타자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타자라는 존재를 우리의 삶 속으로 재소환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타자는 ‘타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성은 내가 모르는 것,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야기,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전달되는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존재가 타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타자는 불편하다. 그런 불편한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외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는 간단하다. 바로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경청(傾聽)이다. 경청의 경(傾)은 ‘기울이다’라는 뜻인데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타인을 향해 나를 기울이는 것이다. 기울여야 다가갈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버(Martin Buber)는 ‘나-너(Ich-Du)’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야 ‘너’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서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청은 타자에게 다가가고 타자와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시키는 실천 행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청’을 할 수 있을까? 엄기호가 ‘단속사회’에서 말했듯이 경청은 우선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이다.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경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성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경청’이라고 할 수 있다. 경청은 타자와의 만남이며,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수많은 타자들이 나의 삶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타자는 가족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이방인의 모습으로 내 옆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은 불편한 타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불편한 타자는 자기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채 난민(難民)처럼 내 주변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온전한 관계 맺음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타자의 존재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 시기에 오히려 내가 먼저 몸을 기울여서 타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묵음 처리 되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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