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이라도 합시다
“고결한 척, 착한 척, 선량한 척…. 제발 좀 하세요. 안하는 것보다 삼만배 낫습니다. 더럽고 악랄하고 불량한 채 날것으로 살 작정입니까?”
우연히 MZ세대(1980년대초∼2000년대초에 출생한 세대)가 트위터에 올린 글을 읽고 처음엔 헛웃음이 나왔다.
대놓고 추하고 상스럽고 악랄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경계심이라도 갖고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런데 가면을 쓴 이들에게는 그런 대비조차 못하고 맥없이 당한다. 이후엔 가해자인 상대방보다 어리석은 자신을 향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순박한 얼굴로 나타나 내 뒤통수를 쳤던 사람, 내 앞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내 장점을 칭송하더니 돌아서서는 험담을 했던 사람, ‘긍휼함이란 단어가 인간으로 표현된다면 이런 사람일 거야’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사기꾼이던 인간, 지인들에게 인격자로 인정받았지만 가정폭력범이었던 사람. 유명인사부터 측근들까지 다양한 얼굴들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각 분야 사기꾼은 물론 위선자에게 기만당한 경험담만 글로 써도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인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이런 순진한 말을 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움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언행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30여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항상 어느 사건의 이면, 사람의 부정적 면을 더 많이 들추거나 살피며 살았다. 수많은 위정자, 기업들이 국민을 속인 바를 찾아내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기자의 의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찾고 미담에도 회의적인 편이었다. 너무도 당당히 다른 사람 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죄책감도 못 느꼈다. 어느 날 직접 본 일이라도 다른 사람 흉을 보는 것이 추해 보인다는 딸의 지적에 충격을 받았다.
훌륭한 엄마는 아니어도 추하고 부끄러운 엄마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후부터 딸에게 다른 사람 험담을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좋은 점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말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어금니 사이로 흉보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말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살짝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돈에 관심 없고 봉사활동이나 환경운동만 한다더니 강남에 집을 샀다고? 실속은 혼자 챙기는 스타일이네. 아니, 안목도 없으면서 요즘 유행한다고 그림을 산다니 허세가 심하다.”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수돗물이 정수 과정을 거치듯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말을 한다.
“재테크에도 관심이 있었구나. 요즘 강남에 집을 마련하는 건 영혼을 다 그러모아야 한다는데 잘됐다. 아무개는 이른 나이에 취향을 발견했구나. 한점이라도 좋은 그림이 집에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지지….”
신기하게도 이렇게 착한 척했더니 점점 착한 말을 하게 된다. 1964년 개봉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천박한 언행을 일삼는 아가씨다. 그런데 한 교수로부터 도움을 받아 귀부인 옷을 입고 발음과 어휘 등을 교정받으면서 진짜 우아한 여성으로 변신한다.
늦기는 했지만 남들에게 잘 보이거나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하게 늙어가지 않도록 착한 척, 관대한 척이라도 해야겠다. 매일매일 젊은이들에게 배운다. 그게 잘 늙어가는 방법이다. 유인경 (방송인)
출처 농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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