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억양만 들어도 아하 남해사람이구나, 딱 봐 통영이네, 진주 말투, 안동 토박이거나, 전라남도 이짝저짝 사람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간 이동이 빈번하고 또 표준어를 안 쓰면 조금 덜떨어진 사람쯤으로 여기는 교육환경 아래서 알게 모르게 옅어져 버렸다. 하지만 표준말 비슷하게 굴려 쓰는 생활을 용케 고수하고 있다가도 동향 사람을 만나면 절로 지방말이 터진다. 우리끼리는 은연중 그걸 더 친밀한 표현방식으로 여기기도 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 한 오 년여 서울에서 살았다. 그 덕에 아이들이 소위 교양있는 표준어를 배울 기회가 생겼지만, 애써 노력해도 서울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부산말 한다고 재미있어했고 부산에 오면 서울말 쓴다고 예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체성이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시 부산에 돌아와 살자 아예 부산 말투로 굳어져 버렸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대상은 가장 가까이서 ‘삐대는’ 사람, 엄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에게 자꾸 말을 거는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 배운다. 말투도 억양도 닮는다. 자라는 과정에서 처음 듣는 단어지만 이런저런 상황에 비춰보며 뜻을 짐작해 스스로 체득하고 또 써먹는다. 그런데 용케 이치에 맞게 쓰는 게 희한하다. 인간 능력의 한계는 계량 불가다.
내가 나름 많은 단어를 알아듣고 또 구사할 줄 아는 까닭은 우리 말을 찰지게 쓴 부모님의 영향을 입은 바 크다. 통영이 고향인 아버지는 같은 말이라도 재미있고 실감 나게 표현하셨고, 남원 출신 새어머니는 다양한 단어와 기찬 비유를 즐겨 쓰셨다. 어릴 적엔 낯선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문장의 맥락 속에서 아하 이런 뜻이겠거니 짐작하고 익혔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도 샌다.” 가만 생각해보면 말이 참 재미있었다. 그렇게 말을 배웠다.
비슷한 단어라 할지라도 미묘하게 다른 고유의 맛이 있다. 그 상황에 딱 맞는 단어를 얹으면 문장이 멋들어진다. 비슷한말이라도 어느 것을 골라 쓰느냐에 따라 글맛에 엄청난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런 만큼 단어가 다양하고 풍요로울수록 맛깔스러운 문장을 지을 수 있다. 풍성한 어휘는 실로 어마어마한 문화적 자산이다. 이 소중한 자산을 비표준어로 규정해 사장하는 어리석은 일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사투리도 담아 우리말을 더 걸쭉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생태계 다양성이나 생물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숱한 종들이 다양한 형태의 생태계를 형성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 다양성이 높으면 먹이 그물이 복잡해지고 생태계의 평형이 잘 유지된다. 생태계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건강해진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아버지는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고 적힌 입간판을 ‘댕기는데 걸거치서 디기 아심찮심다’라 고쳐 쓰고 웃으셨다. 춘향전 판소리를 표준어로 창을 하면 간드러질까? 퍼석퍼석하고 영혼 없는 썰이 되고 말 것이다. 백석의 시를 표준어로 고쳐 쓰면 맛이 어떠할까? 마가리 개니빠디 몽동발이 텅납새기 무이징게국 쇠리쇠리하다 째듯하다 자지러붙다 이즈막 등등 이런 단어들을 다 훑어 쳐낸 표준어는 말라붙은 통나무 꼴 아닌가. 장석주는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부산 사람인 내가 볼 때 표준어는 서울 지역에서 쓰는 방언이다. 여차저차해서 표준어로 정한 사정이야 십분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투리를 그리 각박하게 대하는 것은 잘못된 폭력이다.
사투리를 쓰는 게 촌스럽고 덜떨어진 일로 여기는 자괴감부터 버려야 한다. 신문도 사투리를 쓰면 안 되는 규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사투리에 그리 경기를 일으켜서도 곤란하다. 오히려 신문사가 나서서 사투리를 살리고 우리 언어를 기름지게 만드는 역할을 자임해야 마땅하다. 죽은 백석을 그리지만 말고 살아있는 백석을 키우자. 우선 백석을 낳고 기를 토양부터 만들자.
구영기 전 생명그물 대표